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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누나인가 유관순아줌마인가(1)
사법정의국민연대 기사입력  2009/05/10 [16:22]
유관순누나인가 유관순아줌마인가(1)
친일파가 만들어낸 항일영웅
 
이드
유관순에 대한 오해와 진실

충남 천안시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세계적인 독립운동가 이자 우리민족의 영원한 횃불’로 유관순을 소개하며 시의 첫 번째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천안시는 시의 으뜸가는 자랑거리를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사적관리소를 조직하여 소장 이하 관리팀 ․ 시설팀으로 구성된 9명의 공무원을 투입하고 있는데, 유관순열사기념관 ․ 유관순열사유적 ․ 아우내실내체육관 등을 관리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는 광장 내에 유관순열사기념관, 동상, 추모각, 초혼묘 봉안기념비, 주차장 등이 있으며 부근 매봉산에는 초혼묘, 봉화탑이 그리고 유관순 열사 생가와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가 반경 1㎞ 내외 인근에 소재하고 있다. 사적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인 초혼묘에는 6각의 뿔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다. 

                                 
柳寬順烈士 止墓


『열사의 관향(寬鄕)은 고흥 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柳泰宇) 10대손으로 이곳 아우내 기미독립만세운동 의거에서 순국하신 류중권(柳重權)선생과 이소제(李少悌)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1902년 3월 15일 천원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다.

1919년 4월 1일 이화학당 학생(17세)의 몸으로 서울 3.1 독립선언에 참가한후 고향에 돌아와 아우내 독립만세 주역으로 선봉에서 강열한 항쟁을 전개하다 왜(倭) 관헌에 체포되어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온갖 고문과 악형 끝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항거를 거듭하다 1920년 10월 12일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만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섯토막으로 찟기어 순국하시니 고금에 유례없는 구국의 독립투쟁 열사이시다. 잔인무도한 왜(倭) 관헌에 의하여 시신과 묘소마저 흔적없이 파헤쳐진채 오늘에 이르렀다. 순국후 69년과 3.1독립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의거의 현장 이곳에 겨례의 이름으로 정성을 모아 초혼묘를 모시고 고히 잠드시기를 삼가 비노라.』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초혼묘를 건립한 때는 1989년 10월 12일 인데,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자신들의 자료가 불충분하였음을 인정하며 아래와 같이 수정된 내용을 유관순 열사 기념관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다.

『열사의 관향(寬鄕)은 고흥 유(柳)씨이며 중시조 유태우(柳泰宇)의 10대손으로 이곳 아우내 기미독립만세운동 의거에서 순국하신 유중권(柳重權)선생과 5남매 중 둘째딸이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1902년 12월 16일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이화학당 학생(17세)의 몸으로 서울 3.1 독립선언에 참가한 후 고향에 돌아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주역으로 선봉에서 강렬한 항쟁을 전개하다 왜(倭) 관헌에 체포되어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온갖 고문과 악형 끝에 숨을거두는 순간까지 항거를 거듭하다 1920년 9월 28일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만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국하시니 고금에 유례없는 구국의 독립투쟁 열사이시다. 잔인무도한 왜(倭) 관헌에 의하여 시신과 묘소마저 흔적없이 파헤쳐진 채 오늘에 이르렀다. 순국 후 69년과 3.1독립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의거의 현장 이곳에 겨레의 이름으로 정성을 모아 초혼묘를 모시고 고히 잠드시기를 삼가 비노라.』


▲ ▲사진1: 유관순 열사 초혼묘     © 운영자
두 비문을 비교하여 보면 너무나 중요한 사실들이 변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원 비문에는 열사의 출생일이 1902년 3월 15일인데 반하여 수정 글에는 1902년 12월 16일로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순국일의 경우 1920년 10월 12일에서 1920년 9월 28일로 수정되었다.

세 번째;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기미독립만세운동 의거 당시 순국하신 열사의 가족으로 원문에는 류중권(柳重權)선생과 이소제(李少悌)여사로 되어 있지만 수정 문에는 유중권(柳重權)선생만이 소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 번째; 여섯 토막으로 찟기어 순국하셨다는 내용도 수정된 글에는 삭제되었음도 함께 확인해볼 것을 권유한다.

열사의 생애가 짧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집마저 불타 열사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었으며 해방 이후 유관순열사의 전기나 영화 등에 묘사된 것들이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그동안 생년월일, 순국일 등이 잘못 알려졌다고 기념사업회측은 밝히고 있으나, 또 다른 숨겨진 사실 혹은 왜곡된 진실은 없을까?

대부분의 대중들은 우상 혹은 영웅에 대하여 존경과 환호하며 열광을 표시한다. 심지어, 조작된 영웅이나 영웅 만들기 자체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그들은 영웅 속에서 숨겨진 자신의 욕망을 찾으며 영웅 신화에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통성이 문제되든가 누리고 있는 권력의 지속적인 유지 욕망을 가진 지배 권력은 대중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하여 영웅을 만들어 내곤 했다. 프랑스 비시 정권의 잔 다르크, 나치 독일의 돌격대원 호르스트 베셀 그리고 아버지를 고발한 러시아 소년 파블릭 모로조프 등이 그러하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개발독재 시대의 이승복 소년, 강재구 소령 등은 대중의 사회적 규범을 제시한 예이고, 이순신과 세종의 경우는 권력자와 영웅의 동일시를 통하여 독재 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목표로 한 예이다. 최근의 연예인이나 스포츠계의 스타  만들기는 자본 권력이 어떻게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보면 된다.

영웅이나 위인의 삶이 대중에게 끼치는 긍정적인 효과조차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의 정당화나 종교계의 선교 목적 등 어떤 특정한 세력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영웅을 조작한 것도 용납해야만 할까? 더욱이 자신의 죄과를 희석시키거나 은폐할 목적이 숨겨진 경우라면? 이제부터 국민누나 유관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먼저 유관순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호기심부터 풀어 보기로 하겠다.


1)유관순열사의 표준영정에 대하여

정부는 2007년 2월 6일,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유관순 열사의 표준영정을 충남대 윤여환 교수의 작품으로 교체하며 정부 표준영정 제78호로 지정하였고, 동년 2월28일 새 표준영정을 유 열사 추모각에 봉안했다. 정부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구 영정이 유 열사의 얼굴이 수심에 찬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에 따라 재제작에 들어가 21년 만에 본래 모습을 찾았다“라고 했다. 과연 그러한가? 이번에 새로 선보인 표준영정이 정말 유관순의 진정한 모습일까? 우선 새 표준영정을 함께 보자. (사진2 참조) 

 
▲ ▲사진2: 충남대 윤여환 교수 작품 2007년, 정부 표준 영정 78호     © 운영자


 
 
 
 
 
 
 
 
 
 
 
 
 
 
 
 
 
 
 
 
 
 
 
 
 
 
 
 
 
 
 
 
 
 
 
 
 
 
 
 
 
 

1986년도에 제작된 장우성 화백의 국가표준영정(사진3 우측)은 그동안 천안시에 소재한 유열사 추모각에 봉안되어 왔으나, 고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 유 열사의 실제 모습과 다른 이미지로 제작되었다는 여론과 화가의 친일논란이 불거지자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사진3 : 장우성 화백의 구 국가표준영정 외     © 운영자

 
 
 
 
 
 
 
 
 
 
 
 
 
 
 
 
 
 
 
 
 
 
이것으로서 유관순의 초상화는 4명의 화가가 그린 영정이 남께 되었다. 윤 ․ 장 화백 외의 작품으로는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 소장된 김인승 화백의 작품(1974년, 위 사진 중간)과 1978년에 제작된 조중현 화백의 작품(독립기념관 소장, 위 사진 좌측)) 이 있다.

특별히 눈썰미가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상기 네 사람의 얼굴이 과연 동일한 인물의 초상화인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영정이 또 하나있다. 초등학교 읽기 4-1에 실린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다. (아래 사진4 참조) 


▲ ▲사진4: 초등학교 국어 4-1 읽기에 실려 있는 유관순 열사 영정 모습     ©운영자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요즈음 말로 소위 얼짱의 모습을 한 유관순이 실려 있는 셈이다. 2009년 2월 27일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초등 국어 교과서 편찬자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과교육연구부 관계자는 ‘현행 초등 국어 4학년 1학기 교과서는 2001년에 첫 출판됐다’며 ‘수정사항이 있으면 반영해 매년 새로 출판하고 있지만 첫 출판이 오래되어 교과서 속 유 열사의 영정이 누구의 작품인지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수심 깊은 중년부인의 이미지에서 인기 탤런트도 기가 죽을 얼짱까지 ․ ․ ․ ․

한편, 친일작가의 초상화부터 작가 미상의 상상화까지 ․ ․ ․ ․

그러면 실제 유관순 열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현존하는 유열사의 사진은 다음과 같다. 

▲ ▲사진5: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의 수형기록표, 1919년(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운영자

▲ ▲사진6: 유관순열사 졸업사진( 1918년 3월 말 촬영한 것으로 추정)     © 운영자

▲ ▲사진7: (유관순이 친구들과 찍은 사진)     ©운영자
 
열사의 졸업사진(사진6)이 2004년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서대문형무소 수감당시 수형자기록표에 나와 있는 정면, 측면 사진(사진5)과 이화학당 재학시절 어깨동무 하고 찍은 사진(사진7) 단 두장 뿐이었으니 유관순이라는 명성에 비해 증거자료가 너무나 빈약한 셈이다.

2007년 봉안된 새 표준영정은, “이화학당 재학시절 단체사진 2장과 수형자기록표 사진 등 3장의 합성을 통해 제작에 반영했으며 자료사진 분석을 통해 추가로 찾아낸 속 쌍꺼풀 등도 표현했으며” “21년 만에 유 열사의 생전 모습에 가장 가깝게 재현된 작품이다”라고 문화관광부는 자평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사진 중 수형자기록표에 나와 있는 측면 사진 즉 쪽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에 대해선 왜 아무 언급이 없는지 모르겠다. 사진6과 7의 모습도 비슷하기는 하나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하기에는 사진6의 모습이 너무 흐릿하기만 하다. 그건 그렇고 사진6의 앳된 소녀가 일 년 후 거구의 여인(사진5)으로 변신한 것에 대한 독자의 감상은 어떠한가? 위 3가지의 사진이 정녕 동일한 인물인가?


2)소녀 유관순인가 아줌마 유관순인가?

사진5를 다시 보자.

위 사진의 주인공은 아줌마일까? 처녀일까?

기록에 의하면 일제하 여성의 평균 초혼연령은 1925년에 16.7세, 1930년 17세, 1940년 17.5세 정도였다고 한다. 유관순 관련 자료 중 가장 신뢰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성복심 수형기록부가 참이라면 유관순의 사망 당시 나이는 우리나이로 19세이다. 투옥 시는 18세, 평균 초혼 연령을 초과한 나이이다. 게다가 유관순의 머리는 쪽머리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 까지 소녀 혹은 처녀가 쪽머리를 한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혹 그 당시 감옥(형무소)의 관습이 아니가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으나 일제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다른 여성의 머리 형태를 보면, 처녀의 경우 댕기머리를 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부     © 운영자

결혼 적령기를 넘어선 여성 게다가 쪽머리를 한 여인, 우리가 머리를 땋은 치마저고리의 소녀로 알고 있는 유관순이 실제로는 아줌마가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않은가? 설령 유관순이 유부녀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18세, 19세라면 초등학생이 누나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유관순 이모나 고모가 적당하지 않을까싶다.
 
한편 이 수형기록부는 유관순의 키가 170cm정도였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당시 여성의 평균키가 150cm정도이므로 거인에 가까운 대단한 체격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녀린 소녀 유관순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이미지이다. 쪽머리를 한 거구의 여인, 이 여성이 과연 유관순일까 하는 의문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부     © 운영자

청순하고 진취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항일 민족소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새 표준영정이 봉안되었지만, 아직은 유관순의 진실한 모습에 대하여 보류를 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그러면 유관순에 대한 다른 기본적인 정보는 어떠할까?



3)유관순의 출생일과 순국일은 언제일까?

(표 2)


 

이름

출생일

순국일

비고


생가비문(박화성)

柳寬順

1903. 3.15

1920.10.12

 

초혼묘(김재홍)

柳寬順

1902 .3.15

1920.10.12

 

경성복심 수형기록부

柳寬順

1902.12.17

출옥일(예정)1921.1.2

169.7cm

판결문

柳寬順

18세 12.17

-

징역3년(감형18개월)

호적(유우석)

柳冠順

1902.11.17

1920.9.28

 

족보(1986년 고흥유씨)

柳寬順

1903. 3.15

-

 

초등4-2 읽기

유관순

1902.12.16

1920.9.28

(징역7년)

이달(3월)의 독립운동가

柳寬順

1902.11.17

1920.10.12

 

네이버

柳寬順

1902.12.16

1920.9.28

 

다음

柳寬順

1902. 3.15

1920.

 

전기/유제한(조카뻘)

柳寬順

1904. 3.15

1920.10월 어느 날

 

전기/전영택

柳寬順

1904. 3.15

1920.10.12

 

전기/박화성

柳寬順

-

1920.10.12

 

감리교 인물사전

柳寬順

1904. 3.26

1920.10.12

(징역3년)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하늘 우러러 봅니다.


강소천이 시를 짓고 나운영이 곡을 붙인 이 노래 덕분인지 우리는 유관순 누나라는 호칭에 너무나 익숙해져있다. 이것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는 오래된 세뇌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면 유관순은 정말 초등학생이 누나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나이에 순국하였을까?

상기 표를 보면 알겠지만, 유관순의 생일과 순국일은 천차만별이다.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의 경우, 1904.3.15 출생 1920.10.12 사망으로 처음 기록된 이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현재는 1902.12.16 출생 1920.9.28 사망으로 가르치고 있다. 네티즌이 가장 이용을 많이 하고 있는 네이버와 다음의 경우는 1902.12.16과  1902. 3. 15로 생일이 틀리다. 천안에 소재하고 있는 유적지를 참배하다보면 더더욱 어리둥절해진다.

생가비문에는 1903.3.15 출생 1920.10.12 사망으로 적혀있지만 조금 떨어진 초혼묘에는 1902.3.15 출생 1920.10.12 사망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해서 우리의 국민누나 유관순 열사의 출생일과 순국일이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을까? 게다가 호적에는 柳冠順으로 기록되어있지만 다른 서류에는 柳寬順으로 등장한다.


(유관순의 이름 비교표)


 

 언니

 오빠

유관순

남동생

남동생

족보(1936년 고흥유씨)

-

俊錫

-

一錫

七錫

족보(1986년 고흥유씨)

-

愚錫․

寬順

仁錫․

七錫

호적(유우석)

癸出

愚錫

冠順

仁錫

冠錫

경성복심 수형기록부

-

-

寬順

-

-

초창기 기록(전기 등)

-

  관옥

관순

인석

관석


원죄는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에 있다. 제대로 고증도 하지 않고 유관순의 먼 조카뻘이 되는 유제한의 필사본「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주근거로 삼다보니, 증언자나 관련 자료가 하나둘 발굴될 때 마다 수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 경성복심 수형기록부과 판결문이 공개되고 유우석의 호적 등 신뢰할만한 자료가 증거로 제시되면서 1902.12.16 출생 1920.9.28 사망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듯한데, 사실 이 추론도 문제가 많다.

사망일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나 출생일의 경우, 호적의 11월 17일을 음력으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16일이 되는데 수형기록부의 12월17일과 하루 차이가 나는 것을 계산 착오로 단정하여 1902년 12월16일을 출생일로 결론을 내린 사실은 도무지 설득이 되지 않는다. 담당 공무원의 실수도 믿어 지지 않지만 더욱이 수형기록부의 기록은, 필자의 눈으로 볼 땐 12월17일보다는 오히려 12월 11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5 참조) 아무튼 유관순의 정확한 출생일과 순국일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객관적인 정보의 부족은 유령을 만들 수도 있다. 혹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관순에 대한 이미지는 조작된 사실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지 않은가? 한 가지 예로 유관순의 신앙에 대하여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4)유관순의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가?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선정하여 발표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 유관순 편을 보면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의 부친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라는 내용이 있다. 국가 기관이 주관하는 홍보자료가 이럴진데 기독교 관련 설교집이나 관련 자료야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유관순과 그의 가족을 기독교와 연결시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관순 연구소의 관련 자료에 따르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큰 오해를 하고 있었음이 판명된다.

동 연구소 소식지 제 3호(2003년 5월 1일)에 의하면,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하였다. “나의 부친은 비기독교인 이었다....고집스레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기독교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유빈기(柳斌基) ․ 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는 주장 역시 이미 허위로 판명되었다. 한편 흥호학교도 1909년 목천군수와 지역유지들이 출자하여 세운 학교임이 밝혀졌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오해 속에 살고 있었던가? 유관순이 기독교의 영향 속에 성장했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의 숙부 유중무가 지령리 교회의 선교사 역할을 했으며 이화학당으로의 수학 등이 증거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하는 것은 의문으로 두어야 하며, 더욱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 운운하는 것은 명백히 위증행위임에 틀림없다.

유관순의 1년 선배이자 같은 기숙사에서 5년을 동거했다고 주장하는 보각스님이 재미있는 증언을 한 바 있다.

“이화학당 기숙사는 공부 종을 친 다음 자기 전에 기도종을 치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날은 유관순이 기도하는 날이었는데 유관순은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는 것을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하였다. 친구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고 이 소리를 듣고 사감선생이 달려와 이 방 학생들에게 품행점수를 낙제점을 주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보각스님 집에서 보내온 명태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명태생각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하여 친구들이 다시 한 번 웃게 만들었다. “ .....(유관순 기념관 자료에서 발췌)

이 증언이 참이라면, 유관순의 신앙은 그리 돈독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독실한 신도였다면 장난이라도 ‘명태이름으로 빕니다.’ 운운 하는 행위를 할 수 없었을 터이다. 기독교계는 지금부터라도 거짓된 자료를 가지고 그들의 선교에 이용하는 행위를 중단해야만 할 것이다.

덧붙여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또 있다. 하기 유관순 가계표를 보면 확인이 되겠지만 유관순의 형제는 5남매, 사촌은 7명, 9명 이상의 친조카, 11명 이상의 오촌 조카 등 가까운 친지 들이 대단히 많다. 그런데 이들이 대부분 배제된 체 유관순의 초창기 전기가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이후의 증언도 유관순의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박인덕, 친구라는 보각스님, 남동순 등과 유관순의 먼 친척뻘인 유제한 등은 비중 있게 거론하고 있으나 유관순의 가까운 친지들의 증언은 거의 없다는 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언가 음모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 두겠다. 한국의 잔 다르크로 인식되고 있는 유관순의 이미지도 의심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 유관순 가계도     © 운영자


















 
 
 
 
 
 
 
 
 
 
 
 
 
 
 
 
 
 
 
 
5)유관순은 잔 다르크를 알고 있었을까?


“....그 뒤부터 관순이는 틈만 나면 기도실에 가서, 잔 다르크처럼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노벨과 개미, 한국위인전집, 유관순전기에서 발췌, 엄혜숙 지음)”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흔히 얘기한다. 투철한 신앙심,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의연하게 행동했다는 점이 같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대부분의 전기에 의하면 유관순은 학창시절부터 잔 다르크 닮기를 기도했다는데, 혹 조작된 것은 아닌가?

최근의 보도와 학계의 검증에 의하면,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수학한 시기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이다. 그러면 이 시기에 잔 다르크는 조선인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이었을까? 사실 잔 다르크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나치의 괴뢰 정권이던 프랑스 비시 정권 하의 ‘잔 다르크 영웅 만들기’라는 게 정설로 알고 있다.


물론 유관순의 학창 시절에도 잔 다르크에 대한 정보가 없지는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헨리6세’에서 잔 다르크를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했으며 볼테르와 쉴러는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이외 잔 다르크에 관한 전기 역시 해외에선 다수 출판되었다. 조선에는 한일 병합 이전에 장지연이 ‘애국부인전’이란 신소설에서 애국소녀이자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루었었다.

잔 다르크 관련 영화는 1928년에 제작된 “잔 다르크의 수난‘이란 흑백 무성영화가 최초이므로 유관순이 잔 다르크에 관한 정보를 접할 유일한 통로는 장지연의 소설일 터이다. 과연 유관순이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을 읽고 감동하여 잔 다르크를 우상화하였을까? 아무래도 해방 후, 전영택이 유관순 전기를 작성할 때 잔 다르크 전설에 유관순을 대입하여 동일시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었을까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전영택은 <순국처녀 유관순전>에서 "유관순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길이 잊지 못할 빛나는 존재다. 사십 년 왜정의 역사가 나아 준 놀라운 인물이 많은 가운데 유관순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생애를 가졌나니 온 세계에 널리 전하고 자랑할만한 이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유관순 열사의 사체훼손설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겠다.



6)유관순은 토막 살해되었는가?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조흔파(趙欣坡)는 '왜경고문비화' 유관순 편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침략해 와서 우리 동포들을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해쳤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그러자 일본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들이 무슨 독립을 이룰 힘이 있겠는가.’고 핀잔을 주자 유관순은 일어나 걸상을 들어 검사를 향해 내던졌다. 최종적으로 유관순은 3년에서 7년으로 형이 더 늘어났다.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여러 번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그때마다 일본 헌병들로부터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3.1 운동 1주년이 되는 날에도 감옥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도록 조직했다. 이렇게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고 수감투쟁을 하던 유관순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후유증, 영양실조 등으로 1920년 10월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본 헌병들은 감옥에서 순국한 유관순의 시신을 꺼내어 귀를 자르는 등 잔인한 능욕을 자행했다.”

"유관순은 취조를 받을 때에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곤 했다. 약이 오른 일경(日警)들은 다른 피의자에게 더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 국부에다가 수도 호스를 박고서 수돗물을 틀어놓기도 했으며... 거의 20개월 동안 하루같이 고문을 받았는데... 추운 겨울에 밖에 묶어 앉히고 수도 호스로 물벼락을 퍼부어 입은 옷과 살이 꽁꽁 얼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면 끌어다가 이글거리는 난로 옆에 놓아서 녹이곤 했으며, 어떤 때는 밧줄로 오랫동안 때란 뒤 까무라치면 캄플주사로 회생시키고 다시 때리곤 했다."


(유관순 영화)


 

1948년

1959년

1966년

1974년

감독

윤봉춘

윤봉춘

윤봉춘

김기덕

주연

고춘희

도금봉

엄앵란

문지현


윤봉춘의 영화 외 대부분의 유관순 관련 전기나 자료에도 조흔파의 표현과 그리 다르지 않게 표현되어 그동안 유관순 토막 살해설이 정설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경성복심 판결문과 그 외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희생된 유관순의 가족은 부친만 기록되었으며,

형량도 3년에서 7년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고 영친왕의 결혼 축하 명목으로 오히려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는데, 유관순 연구소와 천안 시청은

“일제 강점기에서는 형무소에서에서 사망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시신을 부검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유관순열사도 형무소에서 순국하였기에 부검을 하였을 것이고 시신을 바로 인수하지 못하였기에 가매장이 된 후에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하였기에 부패가 심하게 되었으며 부검에 의한 부검의 자리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현재로는 형무소의 계속적인 만세운동으로 심한 고문을 받아 그 영향으로 방광파열로 순국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라고

사체 토막설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오해 속에 살고 있었는가? 그러면 언제부터 성녀 혹은 애국열사 유관순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2)편에 계속

 
기사입력: 2009/05/10 [16:22]  최종편집: ⓒ yeslaw.org
 
황남기 09/05/11 [23:56] 수정 삭제  
  그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 와서 유관순 아줌마 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모호 함 그리고 19세면 유관순 누나가 낳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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