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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권력 견제 장치의 시기별 변화상
사법정의국민연대 기사입력  2008/12/08 [15:35]
조선시대 권력 견제 장치의 시기별 변화상
이현정의 역사기행


  

대검찰청 이현정 기록연구사
검찰전자신문 News-Pros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대검찰청 기록연구사 이현정 입니다. 지난달에는 조선시대 권력 견제 장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와 법, 그 아홉 번째 시간으로 조선시대 권력 견제 장치의 시기별 변화상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지난달에 살펴본 바에 따르면, 조선의 언론기구였던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는 간쟁과 탄핵을 통해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견제하면서 권력의 독점과 부정부패를 방지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언관(言官)들의 효과적인 활약을 위해서 조선 정부는 여러 가지 엄격한 검증 절차는 물론 이에 상응하는 제도적 보장과 대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조선 건국 직후부터 그대로 정착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언론 활동도 각 시기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를 시기별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때에는 고려시대에 있었던 사헌부와 사간원이 계속 운영되었는데, 그 주도권은 개국공신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노력했기 때문에 국왕에 대한 견제보다는, 오히려 국왕과 이해관계를 같이하여 고려 왕씨와 그 유신(遺臣)들을 숙청하는데 언론 활동을 집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지 사흘 후 사헌부에서는 고려 왕씨들을 모두 먼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고려말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에게 죄를 주려했던 반이성계파 인물들을 유배 보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태조는 왕권에 손상이 되거나 왕의 의지에 반하는 언론 활동은 강력하게 탄압하려 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1393년 세자빈 유씨와 내시 이만이 간통한 사건에 대해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철저히 조사할 것을 주장했지만, 태조는 언론기관이 사사로운 집안일에 간섭한다고 대노(大怒)하고 오히려 이들을 모두 유배 보냈던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대 왕씨 세력이나 고려 유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언론 활동을 한 관리들은 단 한 번의 좌천이나 유배가 없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차례의 왕자의 난과 사병 혁파를 통해 공신들의 기를 꺾고 왕권을 강화한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에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하여 언론기관을 탄압하였습니다. 일단 태종은 재위기간 동안 언론 담당 관리들에 대해 좌천, 파직, 유배 등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수차례 단행하여 이들을 견제하려 하였으며,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기관의 상소를 아예 자신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3사 언관들이 사표를 올리면 즉각 수리하고 복직을 허용하지 않거나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았고,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어떤 때에는 언관직 신하들이 정기적으로 왕을 접견하고 정치에 대한 의견을 말하거나 자문하는 자리인 조참(朝參)이나 조계(朝啓)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언론 기능은 상소문을 쓰지 않고 승정원을 통해 말로만 의견을 개진하라고 지시하는 등 언론 활동을 사실상 약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더 나아가 태종은 자신이 세 번 충고를 듣고도 허락하지 않으면 언관들은 그 사안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국왕에게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언관들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국왕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른 나라로 가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강력한 왕권지상주의자였던 태종은 이러한 왕권을 제약하려 하는 언관직에게 시종일관 위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던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주로 꼽히는 세종은 언론기관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사실 세종은 통치 전반기에는 아버지 태종과 비슷하게 행동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이 행한 인사(人事)에 대해 언관들이 그 부당함을 주장하자 세종은 이들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했다가 전원 재인사 조치를 내렸으며, 사헌부가 승정원을 통해 상소문을 올리려 했으나 승지가 거부하여 사헌부가 승정원을 탄핵한 사건에 대하여 세종은 승정원의 편을 들어 당시 사헌부 관리에게 일방적인 징계를 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우수한 유학자들을 양성하였고, 또 본인 자신도 유교정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세종20년 이후에는 언관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언관의 주장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이들을 징계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세종 만년에 들어서야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은 점차 자신의 위상을 확립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세종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할아버지 태종처럼 언관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던 것입니다. 일단 집권과정에서 정당성이 없었던 세조는 왕도정치라는 유교 이념의 대변자였던 언관들과 사이가 좋기는 어려웠으며, 또한 신권보다 왕권을 우위에 두고자 했기 때문에 권력을 견제·감시하려는 언관들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만약 언관들이 사소한 일을 문제 삼는다면 이를 거부할 것이고, 또 불교를 숭배하는 자신의 태도를 비판한다면 반드시 꾸짖겠다’고 하면서 언관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더 나아가 세조는 제도적으로도 언관의 기능을 축소했습니다. 즉 25명의 사헌부 관리 중 겸감찰(兼監察) 5명을 삭감하고, 10명밖에 되지 않는 사간원 관리 중 사간 1명, 헌납 2명, 정언 1명 등 무려 4명의 인원을 줄이는 관제 개혁도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는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기 위해 언관, 특히 사간원의 왕권 견제적 기능을 축소시키고 대신 국왕에 직속된 감찰기구로 전환시켜 비리 관리를 감찰하는 일을 전담시키려는 구상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성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는 조선전기에는 세종집권 후반기를 제외하고는 언론기관이 제 기능을 순조롭게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언론기관이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건국 후 100여 년이 지난 성종 때부터였습니다. 주지하듯이 성종 대에는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등 유교적 정치 이념이 고양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언관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판도도 크게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즉 조선 초기 정치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훈구 대신들 대신 유교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림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입문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신진 사림들은 성리학의 이념을 실현하고 훈구파를 쉽게 견제할 수 있는 언관직을 중심으로 진출하여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형성에는 국왕 성종의 태도도 한 몫을 했습니다. 우선 성종은 모범적 유교정치를 실현한다는 명목아래 자신에 대한 간쟁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언관들의 활동을 관대하게 수용하여 자신과 언관의 의견차가 있더라도 전대의 많은 국왕들과 같이 좌천·파직·유배 등 과격한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고 세종 만년처럼 인사 조치를 하는 정도로만 대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언관들은 옳은 말을 하다가 교체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국왕에게 충고를 서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종은 세조 이후 장기간 세력을 떨치던 훈구파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고위관리에 대한 언관들의 적극적인 탄핵도 널리 허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종 이전에는 고위직 신하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언관들이 파직, 하옥, 유배 등을 당하는 일이 많았던 데 비해 사림파가 진출하는 성종 대에 이르면 이런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당대 유명한 실력자였던 한명회가 언관들에 의해 100회 이상이나 탄핵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성종 대에는 어떠한 고위관리라도 언관의 탄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정치구도도 급변하였습니다. 이전까지 국왕과 고위대신이 권력의 두 축을 이루어 대립하던 구도로부터, 성종 이후로는 고위관리인 훈구와 신진관리인 사림, 그리고 국왕이라는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서로 비판·견제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정치구도가 형성됨에 따라 언관들은 간쟁과 탄핵을 통해 국왕과 고위관리들을 비판·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활동이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제도적으로 보장되면서 비판의 범위도 매우 넓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언관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림들의 정치적 비중은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부정부패와 실정으로 인해 사림파에게 많은 비판의 구실을 제공하게 된 훈구파는 점차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사림파가 훈구파를 물리치고 정국을 완전히 주도하게 되지만, 곧바로 사림파끼리 내부 분열이 일어나 몇 개의 붕당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국왕-고위관리-3사언관직 등 3자 상호간의 견제에 의한 권력균형원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절대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국왕과 여러 당파 사이에 상호비판적 공존체제가 형성되는 조선 붕당정치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 왕조는 왜 멸망하게 되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양반지배층의 국제정세와 개혁에 대한 무지(無知), 과도한 수탈로 인한 농민층의 불신,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사회적 통합의 실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등을 주된 원인으로 들고 있지만, 저는 이들과 함께 그 이전까지 존재하였던 권력 견제 시스템의 붕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견제와 균형 원리의 붕괴는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크게 나타났습니다. 일단 세도정치(勢道政治)’란 주지하듯이 특정한 한 가문에 국가권력이 집중된 정치형태를 말합니다. 이 때에는 주로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같은 소수의 외척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왕이나 다른 세력들은 정치적 비중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일종의 권력의 독점 현상이 생긴 것이죠. 이로 인해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매관매직, 부정부패, 그리고 이와 연결된 농민수탈과 같은 사회악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도정치 하에서는 언론기관의 기능이 사실상 유명무실해 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조선왕조의 생명은 언론기관, 그것도 주로 하위직 언론 관리들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권력자의 비리나 위법을 끊임없이 비판하여 절대 권력화를 방지했기 때문에 유지·존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세도정치 하에서는 특정한 가문만이 권력을 독점함에 따라 이러한 언론기능을 담당해야 할 관리들과 이들에 의해 감시 대상이 될 고위관리들이 친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 스승과 제자, 혹은 한 가문 사람이라고 하는 각별한 관계 속에서는 권력자에 대한 추상같은 견제와 심판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죠. 이에 따라 언관들은 고유의 언론기능을 상실하고 고위직 관리들이 시키는 일만 묵묵히 행하는 하위 행정 관리로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도 권력은 견제를 받지 않아 독재화로 치달았고, 이는 다시 부정부패나 매관매직으로 이어져 조선왕조가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큰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시대 권력 견제 장치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권력 견제 장치의 시기별 변천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조선시대 이혼제도의 원칙과 실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현정 연구사는 대검찰청 기록연구사로 현재 근무하고 있으며, 입사 전에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역사학도였습니다.

  역사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대학에서 「한국고대사, 한국문화사」등의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고구려 고분벽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생활사 중심의 주제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기사입력: 2008/12/08 [15:35]  최종편집: ⓒ yesla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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